들어가며
이 글은 "한자를 공부하긴 해야겠는데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안 잡힌다"라고 느끼는 분들을 위해 작성된 글입니다.
누구든 본인에게 잘 맞는 공부법이 있는 법이며, 꼭 이 글에 쓰인 대로만 공부해야 한다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만약 본인에게 잘 맞는 다른 공부법이 있다면 당연히 그것이 정답입니다. 다만 한자 공부에 막막함을 느끼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이 글에 적힌 내용대로 한번 공부해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필요 배경지식
보통 '첫걸음 책' 혹은 '일본어 입문서'로 불리는 수준의 책들, 즉 일본어에 관한 아무런 기초지식도 없는 입문자가 처음 읽는 책에서 다루는 내용들 정도까지는 전부 알고 있는 것으로 가정합니다.
기억의 원리
한자를 공부할 때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는 방법 중 하나가,
"의미, 한국어 음훈, 일본어 음훈을 전부 한번에 외우는건 너무 힘드니 일단 한국어 음훈만 외우고 일본어 음훈은 나중에 단어로 공부해라"
라는 것입니다. 일리 있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조금 다른 방법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기억이라는건 본래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 '서로 연결된 기억 조각들이 많을수록' 각각의 조각들이 더 잘 기억나고 잊혀지지 않게 됩니다. 생물학으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다음에 제시된 정보를 외워야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 동맥: 두껍다, 탄력적이다, 판막이 없다
- 정맥: 얇다, 덜 탄력적이다, 판막이 있다
이걸 아무런 맥락도 없이 무작정 외우려고 하면, 금방 뒤죽박죽이 되고 헷갈려서 뭐가 동맥이고 뭐가 정맥이었는지 잊어버리게 될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두꺼운게 정맥이었나? 판막이 있다? 없다? 뭐지? 하... 암기과목 너무 싫다 진짜" 이렇게 될 확률이 높다는 뜻입니다.
반면 같은 내용을 아래와 같이 공부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피는 동맥에서 나가서 정맥으로 들어온다.
피가 처음 동맥으로 나갈 때는 심장박동에 의한 압력이 대단히 강하게 걸릴 테니, 당연히 그 압력을 버티기 위해 동맥은 두껍고 탄력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피가 몸을 한바퀴 돌고 정맥으로 돌아올 때는 이미 힘을 다 잃고 압력이 훨씬 약해졌을 테니, 정맥은 동맥보다 훨씬 얇아도 되고 덜 탄력적이어도 된다.
반면 압력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피가 힘을 잃고 역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판막이 정맥에는 필요해지게 된다.
글자 수는 몇 배로 늘어났지만, 저렇게 한번 읽고 나면 잊어버리고 싶어도 잊어버리기 힘들 정도로 모든 정보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하나의 구조를 형성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맥락을 제공하게 됩니다.
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상법, 한국어 음훈, 일본어 음훈, 쓰는 방법, 예시단어, 그 모든 것들을 하나로 엮어서 함께 공부하고 나면, 공부한 정보들이 하나로 묶여서 서로가 서로를 떠오르게 해 주는 상승(시너지)효과를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한자를 그런 식으로 공부할 수 있을까요? 그걸 지금부터 설명해보겠습니다.
한자 공부 루틴
21.「後」를 예시로 설명해보겠습니다.
1. 모양과 의미 연결하기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한자의 모양과 의미를 연상법과 부수를 통해 서로 연결하고 맥락을 만들어서 기억하는 것입니다. 먼저 아래 스크린샷을 참조해 주세요(이하의 스크린샷은 모두 21.「後」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 한자를 공부하는 시점에서 彳, 幺, 夂는 전부 처음 보시는 부수/모양자들일 것입니다. 이는 아무 문제도 없으며, 오히려 좋은 일입니다. 왜나하면, 彳, 幺, 夂를 맥락 없이 따로따로 외우려고 하면 정보가 서로 연결되지 않은 채로 고립되어 따로 놀게 되고 결국 쉽게 잊어버리게 되지만, 이렇게 後라는 글자를 공부한다는 맥락 속에서 공부하게 되면 後, 彳, 幺, 夂+한자의 의미+음훈독까지 전부 하나의 구조로 연결되어(위의 동맥-정맥 예시처럼)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저장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같은 부수/모양자가 다른 한자에 등장하더라도 "아~ 이건 그때 거기서 나왔었지" 하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기억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연상법과 한자 모양, 부수, 의미를 한 번에 가장 효과적으로 연결해서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은, 직접 펜을 들고 연상법을 되뇌이면서 안 보고 종이 위에 써보는 것입니다.
"길(彳)..위에서.. 어린이(幺)가.. 부모 뒤를 따라걷다(夂)..니까 뒤쪽, 뒤 후"
이렇게 머릿속으로든 입으로든 되뇌이면서 안 보고 직접 써 보고, 만약 모양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답을 확인해보고 다시한번 써보면 됩니다. 쓰는 것이 귀찮게 느껴질 수 있으나, 실제로 해 보면 눈으로만 보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쉽게 외워진다는 것을 체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런저런 이유로 종이에 쓰면서 공부하기가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면, 같은 과정을 머릿속으로만 그려보면서 공부하시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2. 음독 연결하고 기억하기
그렇게 의미-연상법-글자모양을 하나로 엮어서 기억했다면, 다음은 음독을 외울 차례입니다.
後의 음독은 コウ、ゴ입니다.
음독을 외울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은,
"음독을 따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음독 하나당 해당 음독에 대응하는 대표단어 한 개를 기억하라"
라는 것입니다. 이때, 이 대표단어는 가능하다면 한국어로도 본인에게 익숙한 단어를 고르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면,
- コウ: 後悔(こうかい - 후회)
- ゴ: 最後(さいご - 최후)
이런 식으로 음독 하나당 단어 하나를 통째로 기억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한자 자체의 의미와 각 단어 속에 내재된 "뒤, 나중"이라는 의미(후회: 뒤에 가서 아쉬워하는 것, 최후: 맨 나중->가장 뒤쪽)가 서로 연결되어, 위에서 말했던 "정보들이 서로 연결되어 형성하는 구조와 맥락"이 더더욱 풍부해지고 강해지는 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식으로 공부할 경우 한자를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어휘 공부까지 함께 이루어지는 부가효과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때, 위의 後悔(후회)에서는 뒤쪽의 悔가, 아래의 最後(최후)에서는 앞쪽의 最가 아직 본 적 없는 생소한 한자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 경우는 그냥 무시하시면 됩니다. 아직 모르는 한자는 신경쓰지 말고, 나중에 해당 한자가 나오면 그때 공부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 "후회":「後(コウ)かい」
- "최후":「さい後(ゴ)」
이런 식으로 외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일본어 음독과 한국어 음독은 공부하다 보면 느끼시겠지만 대충 비슷하게 흘러가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후회", "최후" 등 본래부터 익숙한 단어로 함께 기억하다 보면,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후 -> コウ、ゴ" 와 같은 식으로 음독에 대한 대략적인 감이 형성되어 이후에 새로운 한자를 공부할 때도 더 쉽게 기억할 수 있게 됩니다.
3. 훈독 연결하고 기억하기
일본어 한자의 훈독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 형용사, 동사 등의 부류(여기서는 後ろ、後れる)
- 그 외(여기서는 あと、のち)
이것들은 사실 특별한 방법이 있다기보다는, 그냥 "한자를 공부하는 김에 어휘를 같이 공부한다"라는 마음으로 예문을 보면서 공부하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사실 훈독이라는 것이 그냥 그 한자의 뜻에 해당하는 일본어 단어를 말하는 것에 가까워서, 한자의 의미와 훈독은 당연히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한자를 외우는 과정에서 어휘를 함께 공부하는 효과가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만, 어휘 공부가 항상 그렇듯 그냥 막무가내로 외우기보다는 반드시 간단한 예문을 함께 보면서 공부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식입니다.
위에서 보실 수 있듯이, あと・のち・うし(ろ)・おく(れる) 4가지 다 "뒤쪽, 뒤"라는 한자의 본래 의미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단어들입니다. 즉, 각각의 어휘를 맥락 없이 따로 외우는 것보다 "後, 뒤 후"라는 한자의 맥락에서 함께 공부하는 것이 훨씬 기억에 효과적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본래 한자 공부는 어휘 공부도 함께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자 공부 과정에서 같이 공부하는 어휘만으로 어휘가 전부 커버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한자를 이런 식으로 공부하다 보면 어휘 공부를 따로 하지 않아도 생각보다 훨씬 많은 양의 어휘를 자동으로 커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한자를 다 기억했으면, 다음 한자로 넘어가서 지금까지의 과정을 똑같이 반복하시면 됩니다.
마치며
"급할수록 돌아가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에서 설명한 과정들이 다소 길어보일 수 있으나, 막상 공부를 하다 보면 생각보다 훨씬 쉽고 빠르게, 그러면서도 자세하고 정확하게 한자를 공부하고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어를 공부하시는 분들이 더 이상 한자에 막혀 좌절하지 않고 목표한 바를 이루어내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 지금 바로 공부 시작하기 → 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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